- 수필가 황선유는 경남 하동에서 나고 부산에서 수필을 쓴다. 2008년 모교에서 박경리 수필가의 노제를 지낸 일이 묘한 계기가 되어 그해 유병근 문하에 수필 입문. 2011년 '수필과 비평' 등단, 수필집 '전잎을 다듬다', '은은한 것들의 습작','몌별', '수비토의 언어' 발간, 제15회 황의순문학상, 제13회 부산수필가문학상 대상 수상, 지금 부산수필문인협회 계간 '부산수필문예' 편집장, 수필과비평작가회의 부산지부장으로 있다
권대근 '생의 유포피아, 말의 키네틱스
황선유 수필 <수비토의 언어> 24 ‘선수필’ 봄호 게재
들뢰즈 이후 현대철학은 신유물론을 지향한다. 유물론이 사물 그 자체의 본질을 탐구했다면 신유물론은 물질을 사유가 닿지 못하는 곳, 그 너머에 위치시킨다. ‘생을 위하여 저마다 맞춤처럼 직조한 악보를 가진다면 거기에다 지휘자까지 동행한다면, 문밖의 바람처럼 쓸쓸할 일도 늦가을 마른 낙엽처럼 머뭇거릴 일도 잘못 탄 기차처럼 아뜩할 일도 없으리라.’고 한 발단부 첫 문장에 매료되어 끝까지 읽어낸 황선유의 <수비토의 언어>는 오늘날 신유물론의 관계적 존재론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음악을 들을 때같이 사람이 산 보람을 느끼는 때는 없을 듯하다’는 이효석의 말도 이 수필을 읽으며 떠올랐다. 뷔르노 라투르의 ‘행위소연결망이론’에 따르면 복잡계의 세상 속 모든 것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역동적 관계 속에 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작용, 즉 구조접속을 통해 하나의 사건이나 만남은 하나의 의미체가 된다. 사람은 밥만 먹고 자라는 게 아니라 말도 먹고 자란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가끔 한다. 수비토subito의 언어를 사랑하는 황선유와 비인간인 악기의 언어가 구축하는 네트워크의 확장을 눈여겨보는 것이야말로 이 수필을 감상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어떤 언어가 저만큼 나앉은 관계의 거리를 당겨줄까. 한낮의 눈부심을 다독이고 색 바랜 추억을 본디의 색으로 복원할까. 꺼끌한 베옷 같은 마음을 잿물에 삶아낸 듯 연하게 풀어 줄까.” 수비토 같은 언어가 있다면 관계가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을 거라 믿는 작가는 성가 연습을 하다가 관계의 거리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수비토’가 사람이라는 인간 행위소에게 오기 전까지만 해도 언어는 하나의 객체였지만, 사람이라는 행위소를 만나게 됨으로써 ‘생의 한 순간을 신묘하게 돋우는 언어’라는 에이전시가 되어 인간관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 이 수필의 담론층 메시지다.
생명성의 인간과 생명성이 없는 언어와의 연관성, 역동적인 상호관계 위에서, 작가가 느끼는 정서의 결을, 그 색깔을 낯선 음악 언어로 표현한 이 수필은 ’수비토의 언어‘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작가가 갑자기 수비토의 언어를 품는 ‘목표의 변혁’을 이루는 데에 묘미가 있다. 모든 존재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다. ‘얼. 마. 받. 노?’는 행위소들간 충돌, 갈등, 치열한 접속을 잘 표현하고 있는, 이 수필의 압권이다. 그 역동적 상호관계를 파악하면, 언어라는 행위소가 황선유에게 미친 영향, 즉 ‘목표의 변혁’을 분석할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수필감상의 새로운 관점을 확보할 수가 있다.
인간관계를 위하여 맞춤한 언어의 지침서가 왜 없을까마는 작가에게 쉬이 와닿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선유는 살면서 숱하게 언어의 살을 맞았다. 이즈음 교회의 성가대 활동을 통하여 남다른 위안을 얻는다. 단정한 지휘자와 악상으로 기호화하는 음악의 언어에 묘하게 빠지며, 자신의 인생에도 지나온 삶에도 저런 지휘자와 악보가 있었다면 하고 바란다. 저마다 벗어나고 싶은 삶의 굴레가 있다. 누구나 딛고 싶은 생의 유토피아가 있다. 과연 그 바람을 이루는 결정적인 한 수는 무엇일까? 작가의 고민 끝에 말의 키네틱스 ‘수비토의 언어’가 탄생했다.
▼권대근 주요 약력
△남해 출생 △1988년 월간 <동양문학> 수필 등단 후 △<문예사조> 문학평론, △<경북신문> 문학평론 △<중앙일보> 수필 신춘문예 당선 △현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부산교육대학교,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 교수 △한국본격문학가협회 회장 △사)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명예회장 △한국문학세계화위원회 위원장 △평론집 ‘수필은 사기다’, 번역서 ‘한국의 명수필’, 문학이론서 ‘문장가로 가는 길’ 수필집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등 25권 △부산수필문학상 부산펜문학상 월강문학상 여산문학상 정과정문학상 등 수상
<수필>
수비토의 언어
황선유
생을 위하여 저마다 맞춤처럼 직조한 악보를 가진다면 거기에다 친절한 지휘자까지 동행한다면, 문밖의 바람처럼 쓸쓸할 일도 늦가을 마른 낙엽처럼 머뭇거릴 일도 잘못 탄 기차처럼 아뜩할 일도 없으리라.
성가 연습이 한창이었다. 지휘자는 그만한 것도 없이 조용하게 누구에게라 할 것도 없이 막연하게 말을 잇는다. “수비토subito는 ‘갑자기’란 뜻으로 수비토 포르테forte, 수비토 피아노piano 등이 있어요.” 나는 화들짝 상황을 파악하고는 종이컵을 들어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분별과 민망함의 마른 입술을 축였다. 열 가지 음을 다 가려듣는 지휘자가 나를 이르는구나! 대체로 헤아려 보아 어떤 관계가 좋다는 것은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된다는 것이다.
의사소통의 기본적인 도구는 언어이다. 그러므로 생의 모든 관계는 언어로부터 시작하여 언어로 끝을 맺는 일이겠다. 마땅히 지휘자와 성가대와 나, 더하여서 교회와의 관계를 이어가는 언어 또한 선정한 악보에 맞게, 지시하는 악상을 따라 잘 연주한 노래이다. 혹 ‘메라비언의 법칙’을 들먹여본다면, 의사소통에는 전하고자 하는 내용 즉 언어적 요소보다 비언어적 요소가 차지하는 부분이 월등하다. 그중에 으뜸이 목소리라 하니 역설적으로 성가곡의 가사가 전달하는 언어보다 성가대의 목소리로 전하는 언어가 우위임은 이미 당연한 사실이다. 누구이든 목소리 결을 염두에 두어 챙길 이유이기도 하다.
언어가 겉돌면 몸도 마음도 멀찍해진다. 언어에는 언어를 품은 사람의 온기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가 저만큼 나앉은 관계의 거리를 당겨줄까. 한낮의 눈부심을 다독이고 색 바랜 추억을 본디의 색으로 복원할까. 꺼끌한 베옷 같은 마음을 잿물에 삶아낸 듯 연하게 풀어 줄까. 오래 고르지 않고 얼른 입어도 잘 맞는 겉옷처럼, 발의 존재조차 잊은 듯 편안한 신발처럼 그런 언어는 없을까. 생의 위태한 한순간을 신묘하게 돋우고 정물처럼 재우는 수비토 같은 언어가 있긴 할까.
사시사철 브릴란테brillante…, 구족하여 눈이 부시게 찬란한 그를 방문한 날이다. 하늘 가까이 너른 정원이 만화방창하다. 그의 목을 두른 명품 로고 머플러의 꽃도 만개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한쪽 구석의 구겨진 구두에 내 시선이 언뜻 머문다. 나는 딱 한 켤레 있는 저 브랜드의 구두를 고이 모셔 둔다. 차를 따르는 그의 손목이 휘황하다. 어버이날에 딸이 선물했다는 팔찌는 이름이 낯설어서 읊지도 못하겠네. 그는 만날 때마다 한복 치마폭처럼 넉넉한 애정과 들꽃잎 같은 섬세함으로 나의 안부를 살핀다. 그것은 단연코 그의 온 마음이며 명백한 공감화법이다.
나는 틈틈이 카프리치오소capriccioso…, 난데없이 북적이고 쓸데없이 정직한 것까지도 자주 탈을 낸다. “허구한 날 돋보기 걸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남의 글 틀린 글자 잡아내거나 글 한 편을 쓰느라 탈모의 위협을 무릅쓴다.” 내 말이 끝난 뒤의 짧은 적막을 나만 느꼈던 것일까. 그의 말이 마르카토marcato…,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들렸다.
“얼. 마. 받. 노?”
도대체 나는 지금 어떤 언어로 대답이라는 걸 하고 있나. 내 입술 언어의 향방도 모른 채 내 머릿속 언어는 이미 페이드 아웃fade out…, 차츰 미력해지더니 어느 순간 깜빡 스러졌다. 다시 얼마간의 침묵, 그것은 온전한 나만의 침묵. 그러고는 이내 알아차린다. 제아무리 요란스럽던 생의 회오리도 지난 후에 돌아보면 다 허상이 되는 것을. 허상을 오래 붙드는 것은 누추한 일이다. 바람벽에 부딪는 언어의 회오리를 온몸으로 견뎌본 사람들은 그걸 안다. 지워도 남은 흔적일랑은 혼자 가만히 묻을 일이다.
이윽고 관계는 다시 아 템포a tempo…, 내 안에 숨어있을 정연한 이성을 불러 내리라. 등이 곧은 자세로 고쳐 앉고 평범의 낯빛과 보통의 박동을 도로 찾아서 원래의 언어로 돌아가리라. 헤싱헤싱 성긴 올 사이사이에 꽃동산 같은 이야기를 채우리라. 정녕 아무 일 없었던 듯. 오래전 그때 나의 언어가 수비토 포르테… 선연하게, 미욱한 그대로 더 솔직하게 좀 더 아찔하였다면 이은 인연이 되었을까. 만고에 한갓되다.
아무렴 그날 그 순간의 내 언어가 수비토 피아노…, 딱 한 발만 뒷걸음을 디뎠거나 맨 처음처럼 잠잠하였거나 그보다도 오래 아껴둔 자비를 베풀었다면 지금의 날들이 덜 건조할까. 놓친 수비토 그 절묘한 순간의 언어가 묘묘해지는 계절, 시나브로 장미가 시든다.
▼ 수필가 황선유
경남 하동에서 나고 부산에서 수필을 쓴다. 2008년 모교에서 박경리 수필가의 노제를 지낸 일이 묘한 계기가 되어 그해 유병근 문하에 수필 입문. 2011년 <수필과 비평> 등단, 수필집 <전잎을 다듬다>, <은은한 것들의 습작>,<몌별>, <수비토의 언어> 발간, 제15회 황의순문학상, 제13회 부산수필가문학상 대상 수상, 지금 부산수필문인협회 계간 <부산수필문예> 편집장, 수필과비평작가회의 부산지부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