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한 편의 수필/ 한혜경
폭우
퇴근길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와이퍼를 제일 빠른 속도로 작동시켰는데도 앞이 희뿌옇다. 게다가 맞은편 차가 지나가면서 도로에 고여있던 물이 내 차로 확 뿌려져 잠시 앞이 안보이기도 했다. 두려움이 훅 덮쳤다.
이제껏 태풍 중 가장 강하다는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에 상륙하기 전, 서울은 바람은 덜하지만 비가 엄청났다.
지난번 폭우에 사람들이 죽고 많은 곳이 침수되는 피해를 입은 터라 더욱 겁이 났다. 그 화려한 강남역 주변이 자동차들이 둥둥 뜰 정도로 물이 차오르고, 반지하 주택이 침수되어 그곳에 살던 일가족 3명이 목숨을 잃고, 지하주차장에서 빗물에 휩쓸려 실종되었다가 숨진 채 발견되고, 정말 재난영화같은 일들이 벌어졌던 게 불과 한 달 전이다.
불안해하며 조심조심 돌아와 집 안에 들어서니, 비로소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창밖으로 세차게 퍼붓고 있는 비를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비 ‘속’에 있지 않고 ‘밖’에서 바라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태풍 소식을 전하는 앵커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울리는데, 나는 그 위험에서 잠시 유리되어 있다고 할까.
거실 창틀을 프레임으로 한 거대한 풍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어마어마한 기세로 내려꽂히는 비의 무자비함. 그 어떤 것도 배려하지도, 관여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존재에만 집중하는 듯한 힘. 그 앞에 무릎 꿇고 굴복해야 할 것 같은 위풍당당함에 압도당해 한동안 응시했다. 두려움과 아름답다는 인식이 뒤섞인 채.
누군가에겐 큰 피해를 끼치는 태풍이 이처럼 장관을 연출하다니 공평하지 않다고 고개를 젓다가, 또 다른 태풍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의 장면이다.
비바람으로 나무가 휘어질 정도로 흔들리고 우산이 마구 날아다니는 밤, 놀이터의 미끄럼틀 아래 주인공 료타와 아들아이가 함께 앉아있다. 문어 모양 놀이기구 아래 둥글게 휘어진 좁은 공간은 동굴처럼 안온하게 비바람을 막아준다. 손전등으로 밖을 비춰보며 나란히 앉아있는 둘의 모습은 어둑한 가운데 손전등 빛이 주변을 밝히고 있어,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깜깜한 밖과 대조적으로 아늑한 피난처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료타는 소설을 썼지만 생계를 위해 사설탐정으로 일하는데, 버는 돈은 모두 경마로 잃는, 허황된 인물이다. 오랜만에 어머니 집에 와서도 숨겨놓은 돈이 없나 여기저기 서랍을 뒤지고 아버지 위패 옆에 올려둔 떡을 함부로 베어먹는, 철없는 행동을 한다.
아들애는 덕분에 일찍 철이 들었다. 이런 아빠가 싫어서 엄마가 이혼한 거라고 생각하므로, 아빠를 닮지 않으려 한다. 꿈이 뭐냐는 아빠 질문에 ‘공무원’이라고 답하는데, 야구를 좋아하지만 야구선수가 되긴 어렵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이도 아빠에게 “뭐가 되고 싶었냐”며 “되고 싶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는다. 료타는 아직 되지 못했다고 하면서 “되고 못되고는 문제가 아니야.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게 중요해.”라고 덧붙인다. 아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아마도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으리라.
다음날, 태풍이 잦아들어 말갛게 갠 파란 하늘이 펼쳐진다.
어머니가 사는 낡은 연립주택도 살랑이는 나뭇잎과 더불어 청량해 보이고 잔디도 더 파릇해진 것 같다.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 어머니 집을 나서는 이들의 표정도 밝아 보인다.
태풍이 몰아치는 밤, 미끄럼틀 아래 좁은 공간에서의 시간은 이들에게 뭔가 변화를 선사한 것이다. 아주 가녀리지만, 앞으로 새로운 삶이 전개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긴다. 적어도 다르게 살겠다는 결심은 했겠지 싶다.
이들처럼 태풍이 지나간 뒤 누군가의 마음이 누그러지고 누군가는 새로운 결심을 하고 누군가는 꿈을 다시 꾸고 하면 참 좋겠다. 그래서 이번 태풍이 큰 피해 없이 지나가기를, 태풍이 지저분한 것들을 휩쓸어가듯 누군가의 복잡한 마음의 실타래가 조금은 풀리고 정화되기를,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조금이라도 막아주는 무언가가 또는 누군가가 모든 이에게 존재하기를, 빌어본다.
여전히 비는 퍼붓고 있다.
■한혜경 약력
이화여대 국문과 박사
<계간수필> 수필 등단(1998) <한국문학평론> 평론 등단(2002)
저서 : 평론집 <상상의 지도> <시선의 각도> 외
글쓰기이론서 : <말 글 삶> <생각 글 말 - 내 안의 가능성을 보다> 외
수필집 : <아주 오랫동안> <이상한 곳에서 행복을 만나다>(4인 공저) 외
현재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