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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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밀양 출신, 월간 한국수필 신인상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정독도서관권대근수필창작교실 회원, 미리내수필문학회 총무, 동대문문인협회 감사, 제43회 강원경제신문코벤트가든문학상 수상

두 개의 몸, 하나의 영혼

 

 

 

                                                                                송정자

 

찰나에 빠지는 사랑은 있어도 성급한 우정은 드물다. 그래서 사랑은 가끔 체하기도 한다. 세월을 묵혀가며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공고하게 다져가는 우정은, 해를 거듭할수록 실해져가기 마련이다.

북촌 정독도서관 등나무길 옆에는, 문화부에서 세운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비가 있다. 강의실에 올라갈 때, 단 석 점만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횡피 그림을 아무런 절차도 없이 감상을 하며 지나간다. 정선이 평생 수련한 필묵법의 정수가 유감없이 드러난 명작이다. 진하고 연한 묵법의 농담이 혼연일체로 어우러진 경지를 보여준다. 인왕제색도 작품 이 후, 정선의 그림이 번잡함은 사라지고 담묵의 구사가 맑고 부드러워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얼마나 이 작품에 혼을 불어넣었는지 짐작이 간다. 삼성그룹에서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져 어느 수집가의 초대전에서 선보인 이 그림에 구름처럼 관중이 밀려든 것을 보면, 사람들이 그림 너머의 어떤 풍경에 매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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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정자 수필가(에세이문예사 제공)

 

백악산 기슭에 거주하던 겸재 정선은, 한마을에서 동문수학하며 조선 최고의 시화를 남긴 사천 이병연과는 둘도 없는 죽마고우다. 둘은 서촌에서 나고 자란 경화세족으로 사천은 조선 진경시의 거장이며, 겸재는 진경산수의 화성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그림을 그리면 시를 짓고 서로의 작품을 비평하며, 둘은 노년까지 일생을 함께 지냈다. ‘자네와 나는 합쳐야 왕망천이 될 텐데, 그림 날고 시 떨어지고 양 편이 다 허둥대네.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지 보이네. 강서에 지는 저 노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연인이 주고받는 애틋한 이별시가 이러할까. 이 전별시는 겸재가 양천현감으로 떠날 적에 사천이 지어 주었다. 지금의 양천구인데 조선시대의 상황으로 보아 다소 먼 거리라 하더라도, 대단한 브로맨스가 아닐 수 없다. 둘은 떨어져 지내면서 서로의 시와 그림을 바꿔보는 시화환상간을 엮어 두 사람의 콜라보중에도 백미인, 한강변의 서정적인 아름다음을 담은 경교명승첩을 탄생시켰다.

내게도 삼십 년 지기 친구가 있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를 해 낯설기만 한 곳에서 적응이 될 무렵부터, 지금까지 절친한 정을 이어가고 있다. 친구와 나는 딸아이들이 여섯 살 때, 같은 글짓기교실에 등록을 하면서 만났다. 수업이 끝날 때 까지 학부모들은 복도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나는 같은 아파트단지가 아니라서 다른 학부모와 안면도 없었고, 그때는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아마 책을 읽고 있었던 듯하다. 친구는 방대한 책을 읽어서인지 철학적인 면이나 시사, 정치, 경제면에서도 나보다 지성이 훨씬 앞서 있었다. 학벌도 높았고, 가정의 경제수준이나, 삶의 질이 우아한 사모님이었다. 교양 있고 품위 있는 그녀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우리 친구 할까요.

삼십 년을 열무 단처럼 빼곡하게 채워가던 우정이었다, 지리산 둘레길을 발뒤꿈치에 밴드를 붙여가며 종일 걷기도 했다. 섬진강에서는 남편 성토대회를 열어 서로의 편을 들어주며, 그 추임새로 속이 후련해지는 강 길을 따라 한나절을 걸었다. 만 하루도 더 걸려 날아간 카리브해 쿠바, 하바나에서는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카테고리 5등급인 허리캐인 어마가 덮쳤다. 전기가 끊기고 통신마저 두절 되었다. 정전된 까사에서 열악한 촛불 하나에 의지해, 불안한 밤을 몇날 며칠 함께 버티기도 한 사이다. 글을 쓰면 제일 먼저 읽어주는 독자로, 비평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유일한 친구다. 그런 우리에게 일 년간의 공백기가 비집고 들어왔다. 내게 힘든 시기가 찾아왔을 때, 서로 소식을 미루다가 서운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나는 갑작스레 소외됨을 느꼈고, 괴리감까지 보태져 이중의 고통이 찾아왔다. 내가 평소와 같은 편안한 심리가 아닌, 잠을 못 잘 만큼 정신적으로 시달릴 때라 친구를 공감하지 못했다.

조선시대 승정원일기에 영조 27년 윤 오월 하순, 장맛비가 이레 째 퍼부었다는 기록이 있다. 비가 그친 날, 노년에 이른 정선이 뚝뚝 물기가 흐르는 큰 붓을 대담하게 휘둘러, 완숙된 필치를 삽시간에 아래로 내리그었다. 가눌 수 없는 비통함을 붓으로 꾹꾹 눌렀다.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바위를 진한 먹으로 찍어내어, 뭉개진 흔적이 습윤한 분위기를 더 자아낸다. 임종을 앞둔 육십 년 지기를 위해 정선은 붓으로 울며, 화선 같은 벗을 부연함이 사라진 경치 속으로 불러들였다. 벗의 단정하고 고결했던 인품은, 그의 집 취록헌을 연한 농도로 담백하게 표현했다. 오랜 장마가 만들어 낸 폭포에서 막 물안개가 걷혀가는 인왕산처럼, 사천이 하루속히 병석을 털고 일어나기를 간절하게 담아냈다. 화폭에 풀어놓은 절절한 우정을 인왕제색도에 안치했다. 늙고 병들어 운신을 못하는 친구를 비가 그친 인왕산 풍경 속으로 초대하고 싶었을까.

인왕제색도가 완성된 나흘 뒤에 오랜 벗은 세상을 떠났다. 그림 우측 상단 여백에는 인왕제색, 겸재, 신미윤월하완이라는 묵서를 새겼다. 평생 수응화만을 그려내기에 바빴던 정선은 일흔 여섯에 이 그림을 스스로 그렸다. 비 온 뒤의 인왕산 경치를 지금의 효자동 방면에서 바라보며, 친구를 향한 연민에 순간적으로 붓을 든 것이 아니었던가. 노인이지만 아방가르드였던 자신의 예술을 집대성한 결과로. 깊은 우정이 길이 남게 될 명작을 남긴 셈이다.

우정은 하나의 영혼이 두 개의 몸에 살고 있는 것과 같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가. 친구는 나의 속 좁은 외면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손을 내밀었다. 나보다 한층 더 성숙된 정신세계를 가진 친구다. 지금은 나와 같이 정독도서관에서 수필명인이신 권대근 교수님의 불꽃같은 강의를 열심히 듣는 중이다. 삶의 엔딩노트를 작성할 때, 품위 있는 글을 남겨볼까 하는 바람이라 하니 얼마나 멋진가.

나란히 강의실에 앉아있는 친구와 나의 어깨너머로 큰 비가 내린 후, 안개가 흩어지면서 맑게 갠 제색의 인왕산이 섬처럼 말갛게 떠 있다.

 

 

 

▼송정자 약력

경남 밀양 출신, 월간 '한국수필' 신인상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정독도서관권대근수필창작교실 회원, 미리내수필문학회 총무, 동대문문인협회 감사,  제43회 강원경제신문코벤트가든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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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자 수필가, 수필 '두 개의 몸. 하나의 영혼', 절절한 우정을 수필에 안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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